왕 세바스찬 - 워싱턴 사물놀이 대표
최지나: 본인의 문화적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가요?
왕 세바스찬: 저는 한국계 중국계 미국인입니다. 저는 제 한국적 정체성에 더 많이 공감합니다. 제가 전공한 것이 한국 음악이기 때문이죠. 음악을 통해 한국의 전통과 문화 전반에 훨씬 가까워졌어요. 음악 덕분에 어떤 사람들은 저를 ‘완전한 한국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게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한국 음악은 제게 너무나 즐겁고, 제 유산의 일부로서 잘 이해하고 있지만, 제가 혼혈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제 아버지는 중국인이시고, 저는 그 부분도 부정하지 않아요. 다만 한국 문화와 유산을 경험할 기회가 훨씬 더 많았던 것이죠. 미국에서 혼혈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자라나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지금처럼 혼혈 아시아계가 흔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훨씬 많아졌지만, 당시에는 쉽지 않았죠. 그렇지만 음악과 문화 전반에 노출되면서 제 한국적 정체성은 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지나: 한국 전통 타악기(사물놀이)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세바스찬: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쯤, 어머니가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열린 한국 영화제에 자원봉사를 하셨는데, 거기서 사물놀이 공연이 있었어요. 그때 처음 보고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워싱턴 D.C. 지역의 한 팀이었고, 메릴랜드 대학교에 다니던 한국 유학생들이 만든 팀이었어요. 저는 그들의 연습을 보러 자주 갔습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지켜봤어요. 제가 배우기에는 너무 어렸고, 악기도 없었으니까요. 초등학교 2~3학년 때, 어머니 일 때문에 한국으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 메릴랜드 사물놀이팀의 리더도 김덕수 선생님께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분 덕분에 저는 사물광대와 한울림 공연팀들이 막 만들어지던 1990년대 초반의 현장에 함께할 수 있었어요.
그분이 나중에 다시 워싱턴 D.C.로 돌아왔고, 우리 가족도 다시 이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물놀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연주했고, 그 무렵부터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죠 — 계속 이 길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운이 좋았어요. 김동원 선생님이 요요마와 함께 실크로드 앙상블 원년 멤버로 스미소니언 민속예술 축제에 출연하셨는데, 그 자리에서 김동원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이 한국의 김덕수 선생님께 제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그러자 김덕수 선생님께서 “한국에 와서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시험을 봐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정말로 그렇게 했습니다. 사물광대의 신찬선 선생님께 배워서 입시를 준비했고, 합격해서 4년 동안 다니며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해에는 한울림 해외 코디네이터로 직접 김덕수 선생님을 도왔어요. 졸업 후에는 미국으로 돌아왔고, 곧 로버트 프로바인 박사님의 도움으로 2009년에 메릴랜드 대학교에 한국 타악 앙상블을 창단했습니다. 이후 2015년에 워싱턴 사물놀이(Washington Samulnori)를 설립해 지금까지 가르치고 공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나: 당시 프로그램에서 한국 국적이 아닌 학생은 당신뿐이었나요?
세바스찬: 세 번째였습니다. 첫 번째는 독일에서 온 한국인, 두 번째는 일본인이었어요. 저는 최초의 미국인이자 세 번째 외국인으로 입학하고 졸업했습니다. 그 뒤로는 캐나다, 일본, 미국 등에서도 학생들이 들어왔습니다.
지나: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훈련이나 자원을 얻는 데 어려움이 있었나요? 비슷한 길을 가려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점이 개선되면 좋을까요?
세바스찬: 정말 운이 좋았어요. 지역 사물놀이팀을 만난 것이 결정적이었죠. 그게 아니었다면 이 길로 들어서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에는 관련 자원이 전혀 없었어요. 지금은 인터넷 덕분에 훨씬 쉬워졌겠지만, 그때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한예종 졸업 후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죠. 그나마 어릴 때부터 함께했던 워싱턴 지역의 한국무용 학원과 협력하면서 조금씩 연결망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후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일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원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 지점까지 가는 게 정말 큰 도전이었습니다.
지나: 미국으로 돌아온 후,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나요?
세바스찬: 네, 확실히 그랬습니다. 한예종은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는 아무도 몰랐거든요. 주일리아드 같은 수준이라고 설명하곤 했지만, 제 자랑으로 들릴까봐 조심했어요. 다만 사람들이 전혀 모르니까 기준점을 주기 위해서였죠.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과 공연이 쌓이고, 한국문화원과도 협업하면서 인정을 조금씩 받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문화원에서는 한예종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되었어요. 초반에는 정말 어려웠지만, 로버트 프로바인 박사님이 제 실력을 신뢰하고 대학 앙상블의 리더로 세워주신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나: ‘한국계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배경이 당신의 자격을 인정받는 데 장애가 된 적이 있나요?
세바스찬: 네, 종종 있었습니다. 제가 워싱턴 사물놀이 단장 혹은 메릴랜드 대학교 한국 타악 앙상블의 디렉터라고 소개되면 사람들은 “잠깐, 성이 왕(Wang)인데?”라며 의아해합니다. 이름만 보면 중국인처럼 들리니까요. 이런 부분이 쉽지 않았던 건 사실입니다.
지나: 한국에서 커리어를 이어갈 생각은 없었나요?
세바스찬: 원래부터 미국으로 돌아올 계획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느낀 것은, 국악 전공자가 정말 많고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하다는 것이었어요.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전공을 정하니까 이미 기본 실력부터 차이가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한국 문화 속에서 자랐지만, 영어를 못하잖아요. 반대로 저는 영어가 모국어이고, 워싱턴 D.C. 지역에서 자라 미국 사회를 잘 알고 있었죠. 제 목표는 사물놀이를 미국, 특히 제가 자란 지역에서 전문적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나: 미국에서 한국 전통 음악을 하면서 겪은 어려움이 있다면요?
세바스찬: 초반에는 인맥과 노출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사물놀이의 경우는 특히 사람이 부족했어요. 사물놀이는 최소 4명이 필요한데, 저 혼자였으니까요. 뉴욕의 대학 동아리나 여름 캠프에 가서 사람을 모집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노출과 인정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2015년에 워싱턴 사물놀이를 창단했지만, 멤버들의 인생이 바뀌어 떠나기도 해서 다시 모집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팀을 유지하는 게 큰 도전입니다. 또 하나는, 미국 내 다른 국악인들과 네트워킹하는 일이죠.
지나: 미국이나 해외에서 활동하려는 국악인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세바스찬: 먼저, 미국에 이미 활동하고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혼자 하려면 정말 어렵습니다. 저 같은 개인이나, KPAC 같은 단체, 또는 한국무용단 등과 연결되는 게 좋아요. 또 미국의 한국문화원들과 협력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그들은 전통 음악 프로그램을 원하거든요. 저도 워싱턴 한국문화원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확한 비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장르와의 퓨전을 한다든가요. 저도 처음에는 그런 계획이 없었어요. 조언을 구할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 두 번째 조언은 —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보세요. 한 사람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요. 비슷한 방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관계를 이어가세요. 계획과 정보를 갖는 것이 훨씬 수월한 출발점이 됩니다.
지나: 궁극적으로, 한국 음악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세바스찬: 제 목표는 사물놀이가 ‘한국 음악’으로 널리 인식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타이코처럼요. 굳이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몰라도 “아, 그건 한국의 북 연주야”라고 알아볼 수 있게요. 음악적 요소, 리듬, 에너지, 심지어는 비주얼로도요. 그리고 무엇보다 전문적인 수준으로 이를 보여주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큰 무대에서 아마추어 수준의 공연이 한국 타악 전체의 수준으로 오해받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대단하다, 멋지다, 더 알고 싶다”는 반응을 얻고 싶어요. 그런 순간에 영어로 설명해주고, 직접 가르칠 수도 있으니까요.
사물놀이와 한국 타악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제 사명입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가능하다고 믿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도 많아졌고, 국악인들의 수준도 세계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앞으로는 ‘전문성’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나: 해외에서 활동하려는 한국 국악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나요?
세바스찬: 네, 꼭 도전하셨으면 합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었으면 좋겠어요. 혼자서 다 하려면 너무 어렵습니다. 학회나 행사에 가보면 각자 따로 활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서로 협력하고 자원을 공유하면 훨씬 나은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저도 무용단이나 문화원과 협업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일본의 타이코처럼, 한국 전통 공연예술도 미국과 세계에서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물론 미국은 나라가 워낙 커서 거리나 비용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뉴욕 뮤지션들과도 자주 협업하지만, 물리적 거리나 예산 문제 때문에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언젠가 서로 힘을 모아 전국적으로 투어를 하거나, 지역별 대표들이 생기거나, 공동 프로젝트를 하게 된다면, 우리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지나: 마지막으로 해외 진출을 꿈꾸는 한국의 국악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세바스찬: 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한 비전을 가지세요. 가능한 한 많이 준비하고, 훈련도 충분히 받으세요. 설령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시도하세요.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꼭 함께하세요. 혼자서는 쉽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또, 누가 당신의 음악을 들어줄 청중인지 고민하세요. 저의 경우엔 한국계 미국인들이 주요 대상이에요. 저처럼 음악을 통해 자신의 한국적 뿌리와 연결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래서 2007년부터 콜로라도에서 열리는 ‘코리안 헤리티지 캠프(Korean Heritage Camp)’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국 입양아들을 위한 문화 캠프인데,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제게도 큰 보람이 됩니다.
최지나: 코넬대학교 음악과 졸업,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BC)에서 풍물과 사물놀이를 중심으로 민족음악학과 졸업(석사),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시카고한국전통예술원(KPAC)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역임,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세바스찬 왕: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희과 졸업, 현재 메릴랜드대학교 한국 타악 앙상블 디렉터이자, 워싱턴 사물놀이의 설립자 및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